영화 ‘상하이’는 폴이 일본군 상하이 정보 책임자 다나카(와타나베 켄 분)에 의해 감금 및 고문당하는 오프닝을 수일 전의 회상으로 연결시킵니다. 폴이 첩보원으로서 비밀공작에 종사하고 팜므 파탈 애나가 은밀히 항일 운동을 주도하는 등 외형적으로는 첩보물의 성격이 두드러집니다. 커너의 죽음과 일본군의 기밀의 열쇠를 쥔 스미코(기쿠치 린코 분)의 행방을 폴이 찾아 나서며 다수의 등장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킨 관계로 인해 일견 복잡한 스릴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잔뜩 비틀어놓은 ‘상하이’의 서사의 본질은 실제로 단순합니다. 스릴러라면 관객과의 두뇌 싸움을 위해 나름의 단서들을 제공하며 개연성을 확보한 다음 반전으로 뒤집는 것이 기본인데, ‘상하이’는 단서를 제공하지 않으며 반전 역시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결말에서 가장 중요한 다나카의 선택(반전)은, 그가 부상을 입은 과정을 상기하면 급작스럽다 못해 뜬금없기까지 합니다.
폴이 동분서주하는 이유는 일본의 숨겨진 계획을 밝혀내 저지하기 위함입니다. 국내 예고 및 홍보 과정과 영화 본편의 오프닝 자막에서 ‘진주만’을 언급하는데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성공했다는 것을 관객 중에 모르는 이가 없기에 폴의 실패는 폴만이 모르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주인공의 운신의 폭과 결말은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못하며 해피 엔딩도 아닌 어정쩡한 결말 역시 약점입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행동과 심리, 서사의 전개를 내레이션에 의존하며 각본의 한계를 여실히 노출합니다. 내레이션은 주인공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며 관객에게 친절함을 베풀 수는 있지만 그만큼 극적 긴장감을 반감시키고 각본의 허술함을 내레이션에 의존해 메우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데, ‘상하이’의 내레이션은 약점이 보다 두드러집니다. 특히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폴의 내레이션은 결말의 영상과는 달라 이질적입니다.
결국 ‘상하이’는 첩보물이라기보다 멜로물로 보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애나와 스미코를 둘러싼 각각의 삼각관계가 서사 전반을 좌우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멜로 영화라고 하기에는 등장인물의 사랑의 감정에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여지가 많지 않으며 그렇다고 애절함을 자아내지도 못합니다. 유치하더라도 신파로 가는 편이 어땠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역사에 희생되는 연인들’을 묘사하려 했다면 보다 큰 스케일로 시대적 압박감을 재현했어야 하는데, 폴이 상하이에 도착하는 오프닝 정도를 제외하면 국제도시로서의 상하이의 면모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액션 장면 역시 평이합니다.
존 쿠삭, 공리, 주윤발, 와타나베 켄의 주연뿐만 아니라 기쿠치 린코, 데이빗 모스, 프랑카 포텐테에 이르는 조연까지 화려한 다국적 캐스팅의 배우들도 평범한 각본으로 인해 선악이 확연히 구분된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네 주연 배우 중 가장 비중이 적은 것은 주윤발인데, 그나마 그가 인상적인 장면은 ‘영웅본색’을 연상시키는 두 번의 총격전 장면뿐입니다. 주윤발과 공리의 어긋난 부부 관계는 ‘황후화’를 연상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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