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2월 24일 목요일

상하이 - 허술한 첩보 멜로, 캐스팅 아깝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1년 미국의 스파이 폴(존 쿠삭 분)은 기자를 가장해 상하이에 도착합니다.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인 커너(제프리 딘 모건 분)의 죽음의 실마리를 찾던 폴은 삼합회 두목 앤소니(주윤발 분)의 아내 애나(공리 분)에 호감을 느낍니다.

영화 ‘상하이’는 폴이 일본군 상하이 정보 책임자 다나카(와타나베 켄 분)에 의해 감금 및 고문당하는 오프닝을 수일 전의 회상으로 연결시킵니다. 폴이 첩보원으로서 비밀공작에 종사하고 팜므 파탈 애나가 은밀히 항일 운동을 주도하는 등 외형적으로는 첩보물의 성격이 두드러집니다. 커너의 죽음과 일본군의 기밀의 열쇠를 쥔 스미코(기쿠치 린코 분)의 행방을 폴이 찾아 나서며 다수의 등장인물들 간의 얽히고설킨 관계로 인해 일견 복잡한 스릴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잔뜩 비틀어놓은 ‘상하이’의 서사의 본질은 실제로 단순합니다. 스릴러라면 관객과의 두뇌 싸움을 위해 나름의 단서들을 제공하며 개연성을 확보한 다음 반전으로 뒤집는 것이 기본인데, ‘상하이’는 단서를 제공하지 않으며 반전 역시 개연성을 확보하지 못합니다. 이를테면 결말에서 가장 중요한 다나카의 선택(반전)은, 그가 부상을 입은 과정을 상기하면 급작스럽다 못해 뜬금없기까지 합니다.

폴이 동분서주하는 이유는 일본의 숨겨진 계획을 밝혀내 저지하기 위함입니다. 국내 예고 및 홍보 과정과 영화 본편의 오프닝 자막에서 ‘진주만’을 언급하는데 일본의 진주만 기습이 성공했다는 것을 관객 중에 모르는 이가 없기에 폴의 실패는 폴만이 모르고 있는 셈입니다. 따라서 주인공의 운신의 폭과 결말은 극히 한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제공하지 못하며 해피 엔딩도 아닌 어정쩡한 결말 역시 약점입니다.

게다가 주인공의 행동과 심리, 서사의 전개를 내레이션에 의존하며 각본의 한계를 여실히 노출합니다. 내레이션은 주인공의 심리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며 관객에게 친절함을 베풀 수는 있지만 그만큼 극적 긴장감을 반감시키고 각본의 허술함을 내레이션에 의존해 메우는 약점을 지니고 있는데, ‘상하이’의 내레이션은 약점이 보다 두드러집니다. 특히 에필로그에 해당하는 폴의 내레이션은 결말의 영상과는 달라 이질적입니다.

결국 ‘상하이’는 첩보물이라기보다 멜로물로 보는 편이 나을 듯싶습니다. 애나와 스미코를 둘러싼 각각의 삼각관계가 서사 전반을 좌우하니 말입니다. 하지만 멜로 영화라고 하기에는 등장인물의 사랑의 감정에 관객이 감정을 이입할 여지가 많지 않으며 그렇다고 애절함을 자아내지도 못합니다. 유치하더라도 신파로 가는 편이 어땠을까 싶을 정도입니다. ‘역사에 희생되는 연인들’을 묘사하려 했다면 보다 큰 스케일로 시대적 압박감을 재현했어야 하는데, 폴이 상하이에 도착하는 오프닝 정도를 제외하면 국제도시로서의 상하이의 면모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액션 장면 역시 평이합니다.

존 쿠삭, 공리, 주윤발, 와타나베 켄의 주연뿐만 아니라 기쿠치 린코, 데이빗 모스, 프랑카 포텐테에 이르는 조연까지 화려한 다국적 캐스팅의 배우들도 평범한 각본으로 인해 선악이 확연히 구분된 스테레오 타입의 인물을 연기하는 것으로 귀결됩니다. 네 주연 배우 중 가장 비중이 적은 것은 주윤발인데, 그나마 그가 인상적인 장면은 ‘영웅본색’을 연상시키는 두 번의 총격전 장면뿐입니다. 주윤발과 공리의 어긋난 부부 관계는 ‘황후화’를 연상시킵니다.

록키 - 전설 넘어 신화가 된 남자의 로망

갱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무명 복서 록키(실베스터 스탤론 분)가 갑자기 챔피언 아폴로(칼 웨더스 분)의 상대로 발탁되어 타이틀전을 벌인다는 1979년 작 ‘록키’는 아메리칸 드림이자 신데렐라 스토리의 화신과 같은 작품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3류 인생에서 하루아침에 자본주의의 총아인 스포츠 스타로 만인의 주목을 받는 위치에 서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기에 그 같은 평가는 당연한 것처럼 보입니다. 독립 200주년을 기념하는 1976년 독립 전쟁의 본거지이자 한때 수도이기도 했던 필라델피아를 배경으로 이민자의 후손인 이탈리아계의 도전이라는 줄거리 역시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주제에 충실히 복무하는 듯합니다. ‘록키’의 성공으로 포르노 배우 출신의 무명 실베스터 스탤론은 록키처럼 신데렐라가 되어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록키’는 타이틀 롤인 록키의 성격처럼 솔직담백하며 우직하고 직선적인 영화입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정치적인 주제 의식 이전에 남자의 소박한 로망에 초점을 맞출 수 있습니다. 배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날건달이 승패에 초연한 자세로 원초적인 권투 경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확인하고 사랑을 성취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빌 콘티의 메인 테마 ‘Gonna Fly Now’가 깔리는 가운데 결전을 앞두고 록키가 필라델피아의 거리를 질주하는 명장면은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를 일깨우며 ‘Going The Distance’를 배경으로 아폴로에게 마구 얻어맞아 다운당한 록키가 버둥거리는 순간 경기장에 들어온 애드리안이 차마 록키를 바라보지 못해 고개를 돌리는 장면은 가슴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 치밀어 오르게 합니다. 결말에서 판정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연인 애드리안(탈리아 샤이어 분)의 이름을 울부짖는 록키의 모습은 그가 가장 원하는 것은 사회적 성공이나 부, 즉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가 아니라 소박한 사랑임을 입증합니다. 애드리안과 포옹하는 록키는 모든 것을 손에 넣은 듯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습니다. 만일 단순히 아메리칸 드림을 정치적, 사회적 차원에서 설파하는 작품에 그쳤다면 ‘록키’는 전설을 넘어 신화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인종주의적 색채를 지닌 작품으로 규정할 수는 없지만 ‘록키’에는 묘한 인종적 긴장과 전복으로 가득한 것이 사실입니다. 권투 중량급 타이틀을 흑인이 석권하던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지만 흑인 챔피언을 상대로 백인 선수가 도전하는 흑백 대결 구도는 인종적으로 선명한 대비를 이룹니다. 흑인 챔피언의 이름이 그리스 신화의 신의 이름과 동일한 것이나, 아폴로가 조지 워싱턴과 엉클 조의 코스프레를 하고 등장하는 것, 그리고 흑인 라운드 걸이 역시 백인인 자유의 여신의 코스프레를 한 것 등은 인종적 전복을 통해 긴장감을 자아냅니다. 스포츠를 비즈니스로 숙지하고 있으며 방정맞을 정도로 쇼맨십이 뛰어난 아폴로는 록키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철저히 미국적인 인물입니다. 그에 맞서는 록키의 별명은 ‘이탈리아 종마(Italian Stallion)’인데 ‘종마(Stallion)’는 직접 집필한 각본의 연출작에서 타이틀 롤까지 맡은 실베스터 스탤론(Sylvester Stallone)의 이름을 연상시킵니다. 극중에서도 언급되듯이 록키라는 이름은 전설적인 권투 선수 록키 마르시아노에서 따온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무려 6편까지 시리즈물로 이어진 만화처럼 황당무계한 권투 영화처럼 인식되기도 하지만, ‘록키’만 놓고 보면 권투 경기 장면은 실제로는 매우 짧아 아폴로와의 경기도 119분의 러닝 타임 중 단 10분을 할애할 뿐입니다. 난타전으로 점철된 경기 직후 록키와 아폴로의 ‘재 경기는 없다’는 단언에도 불구하고 3년 뒤 ‘록키2’가 개봉되며 시리즈물의 길을 걸으며 평범한 오락 영화로 전락했으며 ‘록키4’처럼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노골적인 미국 찬양과 반소 감정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비판받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리즈의 원조 ‘록키’를 폄하할 수는 없습니다. 도리어 후속편들이야말로 ‘록키’가 얼마나 훌륭한 영화인지를 극적으로 대비시키며 두드러지게 합니다.

‘록키’를 처음 접한 것은 1980년대 후반 어느 토요일 오후 KBS 2TV의 더빙판을 통해서였습니다. 록키로 분한 성우는 이정구, 애드리안은 장유진, 아폴로는 고 엄주환이었습니다. 당시 범우사의 문고판으로도 ‘록키’가 출간된 바 있는데, 실베스터 스탤론의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어떻게 국내에 소설로 출간되었는지는 지금도 의문입니다.

서울아트시네마의 2011년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를 통해 필름으로 다시 만난 ‘록키’에는 새로운 점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우선 결말의 권투 장면이 기억보다 너무나 짧았습니다. 아폴로와의 대결은 대략 30분 정도 할애했던 것처럼 기억했는데 고작 10분이라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아마도 후속편으로 인해 기억이 윤색된 듯합니다. 탈리아 샤이어가 분한 애드리안의 외모와 성격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습니다. 두툼한 뿔테 안경이 상징하는 촌스럽고 수줍음 많은 애드리안이 록키와 사랑에 빠진 후 세련된 모습으로 탈바꿈하며 활달하게 변화하는 모습과 함께 애드리안도 처음부터 록키를 좋아했다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20여 년 전 처음 시청했을 때에는 몰랐던 애드리안의 오빠이자 록키의 친구인 폴리(버트 영 분)가 알코올 의존으로 묘사되며 아폴로 역의 칼 웨더스의 실제 목소리가 성우 엄주환과 비슷하다는 사실도 발견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서울아트시네마의 ‘록키’는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처럼 필름의 상태가 좋지 않아 점프 컷처럼 툭툭 끊기는 붉은 화면으로 가득한 탓에 무료 상영되었습니다. 상영 종료 후에는 친구들의 영화로 선택한 ‘기담’의 감독 정가형제와 김성욱 프로그래머의 시네토크가 이어졌습니다. 정가형제가 아니었다면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관람할 수 없는 영화였을 것이라며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한 김성욱 프로그래머와 ‘록키’를 긍정하는 정가형제의 관점의 차이를 비교하며 관객들이 참여해 다양한 의견을 개진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린 호넷 - 미셸 공드리의 유치하지만 귀여운 히어로 영화

신문사를 경영하는 아버지 제임스(톰 윌킨슨 분)와 사이가 좋지 않은 브릿(세스 로건 분)은 아버지의 급사 이후 케이토(주걸륜 분)의 도움으로 히어로 그린 호넷이 되어 좌충우돌합니다. 신문사를 이용한 브릿의 언론 플레이로 그린 호넷은 일약 유명해지지만 갱 두목 처드노프스키(크리스토퍼 왈츠 분)의 도전을 받게 됩니다.

라디오 드라마 및 만화 원작을 각색한 ‘그린 호넷’은 미셸 공드리에 의해 영화화되었습니다. 히어로 영화와 ‘이터널 선샤인’의 미셸 공드리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인데, 때문에 ‘그린 호넷’은 장단점이 지나치게 선명해 호불호가 확연히 갈릴 것으로 보입니다.

‘그린 호넷’의 약점은 곧 미셸 공드리의 약점입니다. 액션 블록버스터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유지해온 프랑스 출신의 미셸 공드리가 연출한 ‘그린 호넷’은 히어로 영화가 담보해야 할 액션 장면이 평이합니다. 스케일이나 박력, 독창성 모든 면에서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합니다. 이것저것 잔뜩 벌려놓고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는 산만함과 유치한 감수성은 ‘그린 호넷’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악당들 간의 연관 관계를 별다른 단서 없이 브릿이 손쉽게 끼워 맞추는 추리 과정은 추측에만 의존해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크리스토퍼 왈츠는 ‘바스터즈 : 거친 녀석들’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할 정도로 연기력이 검증된 배우지만 그가 분한 악역 처드노프스키는 카리스마도, 유머 감각도 부족해 배우의 연기력, 특히 출중한 대사 소화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이는 각본의 한계에 기인합니다.

3D 영화이지만 케이토의 일부 격투 장면과 만화 스타일의 엔드 크레딧을 제외하면 3D 효과가 미미하다는 것 역시 약점입니다. ‘아바타’ 이후 3D 영화들이 범람하고 있으나 ‘아바타’로 높아진 3D의 눈높이를 충족시키는 영화는 아직 등장하지 못했습니다.

타이틀 롤 그린 호넷의 히어로로서의 매력이 여타 히어로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도 약점입니다. 슈퍼맨이나 스파이더맨처럼 초능력을 보유하지 못했고 배트맨처럼 육체적, 정신적 능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엄격하게 수련하는 것도 아닙니다. 초반 제시되는 브릿의 어린 시절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히어로라면 응당 자랑해야 할 근육질의 날렵한 맵시와는 거리가 먼, 살찌고 아랫배가 나온 평범한 몸매의 히어로라는 점에서 관객이 요구하는 환상을 충족시키지 못합니다. 브릿은 단지 부와 권력을 쥔 아버지와 완벽한 동료(케이토)를 얻는 행운을 누리는 것뿐입니다. 초능력을 지니지 못했으며 정신적으로도 미숙한 주인공이 히어로가 되어 좌충우돌하며 발랄함으로 승부하는 히어로 영화는 이미 ‘킥 애스’가 선구적 역할을 한 바 있기에 ‘그린 호넷’이 새롭지는 않습니다.

게다가 다른 히어로 영화를 통해 친숙한 설정들로 가득합니다. 막강한 발언력을 지닌 언론사가 배경이 되는 것은 ‘슈퍼맨’과 ‘스파이더맨’을, 부자 히어로가 아낌없는 투자로 다양한 신무기를 개발 및 활용하는 것은 ‘배트맨’(1960년대에 방영된 ‘그린 호넷’의 TV 드라마에는 배트맨이 카메오 출연한 적도 있습니다.)과 ‘아이언맨’을, 조수와 2인 1조로 행동하는 것은 ‘배트맨과 로빈’을, 카메론 디아즈가 분한 섹시한 여비서 르노어가 충동적이며 무책임한 주인공을 뒷받침하며 모든 남성이 꿈꾸는 여비서 판타지를 자극하는 것은 ‘아이언맨’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나름의 매력도 있습니다. 미셸 공드리의 유치한 감수성은 히어로 영화에서는 신선한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린 호넷’에서 가장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은 브릿과 케이토가 르노어를 둘러싸고 온 집 안을 박살내며 개싸움을 벌이는 것인데, 서로에 대한 의존도가 높으면서도 여자를 두고 싸우는 것은 단순한 삼각관계를 넘어 극중에서 농담처럼 암시되듯 두 남성 캐릭터의 동성애 치정싸움을 연상시킵니다. 격투에 젬병인 주인공 역시 참신함으로 수용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그린 호넷’의 가장 큰 매력은 의외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케이토 역의 주걸륜입니다. 케이토의 영문 표기는 ‘Kato’로 일본인의 이름이지만 극중에서 케이토는 상하이 출신의 중국인이며 캐스팅된 것도 대만 출신의 주걸륜입니다. 이는 1960년대의 TV 드라마에서 케이토로 분해 스타덤에 오른 것이 이소룡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번 극장판에는 이소룡에 대한 오마쥬가 곳곳에서 눈에 띕니다. 케이토의 스케치북에는 이소룡이 그려져 있습니다. 케이토는 이소룡처럼 총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격투로 적을 제압하며 후반에는 이소룡의 상징인 쌍절곤을 휘두르며 적과 맞섭니다. 이소룡의 배역을 물려받은 것이 주걸륜에게는 대단한 영광일 것입니다.

브릿과의 관계에 대해 케이토는 중국어로 형제를 의미하는 ‘숑디(兄弟)’라는 단어를 사용해 주종 관계를 부인하며 오리엔탈리즘이라는 비판을 의식합니다. 두 사람이 형제라면 브릿이 형이고 케이토가 동생이겠지만 실제 배우들의 나이를 따지면 세스 로건은 1982년 생이며 주걸륜은 1979년 생으로 주걸륜이 나이가 더 많지만 극중에서의 이미지도 그렇고 배우의 마스크 또한 주걸륜이 훨씬 어려보입니다. 케이토가 피아노를 치며 르노어를 유혹하는 장면은 주걸륜의 연출작이자 출연작 ‘말할 수 없는 비밀’을, 농구공을 능숙하게 다루는 장면은 ‘쿵푸 덩크’를 연상시킵니다. 엔드 크레딧과 함께 흐르는 주제가 역시 주걸륜의 몫입니다. 미셸 공드리가 아시아 시장에서의 흥행을 위해 주걸륜을 여러모로 배려한 것으로 보입니다.

속편과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는 미셸 공드리가 과연 ‘그린 호넷’의 속편을 제작할지는 미지수입니다. 살아남은 악당도 없으며 브릿이 새로운 능력을 습득한 것 외에는 속편의 여지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속편을 암시하는 엔드 크레딧 이후의 후크도 없습니다.

24시티 - 진실성 반감시킨 페이크 다큐멘터리

지아장커의 2008년 작 ‘24시티’는 중국 청두의 420군수공장이 철거되어 대규모 고급 아파트 단지 24시티로 개발되는 과정의 묘사와, 420공장으로 인해 1958년 강제 이주되어 청춘을 바쳐야했던 노년층부터 그들을 부모로 둔 20대까지 다양한 세대들의 내레이션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112분의 러닝 타임 동안 등장하는 8명의 내레이터 중 4명은 실제 420공장과 인연을 맺은 인물이지만 다른 4명은 직업 배우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24시티’는 다큐멘터리와 페이크 다큐멘터리를 혼합한 형식입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작품의 진실성에 의심을 받을 수 없는데 왜 지아장커가 직업 배우들을 기용했는지는 의문입니다. 게다가 실존 인물들과 직업 배우들의 화술과 표정 및 동작의 차이가 크게 두드러져 쉽게 구분할 수 있습니다.

실존 인물들은 일반인이 그러하듯 동어 반복, 말더듬 등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세련되지 못한 화법을 구사하지만 직업 배우들은 지나치게 표정과 동작이 능수능란하고 화술이 일목요연해 뚜렷이 대조됩니다. 이를테면 드라마 ‘삼국’에서 조조로 분했던 진건빈은 1966년에 청두에서 태어난 송웨이동으로 분했는데, 감독과 대화를 주고받으며 연기하는 모습이 배우답게 능청맞습니다. 중국 정부에 의해 정치적 불이익을 받을 것을 우려하여 출연을 꺼린 실존 인물의 사연을 직업 배우들이 대독(代讀)한 것이거나 혹은 몇몇 인물들의 사연을 조합해 한 사람의 사연인 것처럼 극적으로 각색한 것일 수도 있으나 직업 배우를 기용한 것은 극적 효과는 높이지만 진실성을 떨어뜨리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8명 중 구세대의 사연은 기구합니다. 청두로 강제 이주되어 부모와 헤어지고 자식을 잃어야 했던 사연, 420공장에 취직하기 위해 첫사랑과 이별해야 했던 사연 등 공산당의 폭압적 개발로 인해 소중한 인연을 포기해야 했던 중국인들의 신산스런 삶이 조명됩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 태어난 젊은 세대의 술회는 다릅니다. 공장에서 평생을 보내야 하는 운명을 거부하고 다시 공부를 해 아나운서가 된 조우강과 420공장에 헌신한 부모와는 대조적으로 자유분방한 삶을 추구하는 수나(자오 타오 분)는 기성세대와는 대조적입니다. 뉴 비틀과 루이 비통으로 대변되는 신세대 수나는 부모와의 화해를 눈물로 고백하며 중국의 근대화에 몸 바친 기성세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것을 잊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나로 분한 자오 타오 역시 직업 배우이기에 눈물 어린 고백 또한 진실성이 의심스럽습니다. 지아장커의 기교가 지나쳐 주제 의식을 잠식하는 것이 아쉽습니다.

가장 흥미로운 장면은 고향 상하이의 대가족에 반발해 청두의 420공장 근속을 자청해 청춘을 바치느라 결혼도 하지 못한 샤오화(조안천 분)의 등장입니다. 극중에서 본명은 구민화이지만 그녀가 샤오화로 불리는 것은 배우 조안천이 타이틀 롤로 분했던 1979년 작 영화 ‘샤오화’의 여주인공과 닮았기 때문입니다. 젊은 시절 ‘샤오화’에 등장했던 조안천과 현재의 샤오화(구민화), 즉 조안천이 대비되는데, 배우가 분한 허구 속 인물이 현실의 배우와 닮았다는 설정은 ‘오션스 트웰브’에서 줄리아 로버츠가 분한 테스가 배우 줄리아 로버츠와 닮았다고 묘사되는 것과 동일한 방식입니다. 조안천은 ‘마지막 황제’를 통해 국내에도 알려져 있지만 막상 웃으라고 만든 이 장면의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소수의 중국인 관객을 제외하면 웃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24시티’는 중국의 폭압적 근대화의 과정에서 희생되는 민중의 삶이라는 지아장커의 일관된 주제의식에 충실한 작품입니다. 직설적인 내레이션은 물론 카메라 너머 관객을 응시하는 무표정한 중국 노동자들의 주름살은 주제의식을 뒷받침합니다. 결말에서 수나는 ‘명품을 밝히는 게으른 부자들’을 언급하는데, 이는 극중에 출연한 다수의 노동자 계급이 고혈을 빨리며 착취당하는 동안 유유자적 부를 쌓은 특권 계급이 있음을 노골적으로 꼬집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24시티’에 묘사되는 중국의 폭압적 근대화와 빈부격차는 한국도 예외는 아니기에 남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1월 한 달 동안 ‘사라지는 것들을 마주보기 : 지아장커 특별전’으로 씨너스 이수에서 상영된 네 편의 영화 중 1월의 마지막 날을 장식한 ‘24시티’는 안타깝게도 필름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영사 사고가 발생해 상영 중단 후 재상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다행히 재상영 이후에는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1966년’을 ‘천구백육십육년’으로 표기하고 ‘420’을 베트남의 지명이 연상되는 ‘사이공’으로 번역해 짧은 시간 동안 빨리 읽어야 하는 가독성을 떨어뜨린 한글 자막은 옥에 티였습니다.

타운 - ‘히트’로 시작, ‘쇼생크 탈출’로 끝나다

※ 본 포스팅은 ‘타운’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보스턴 찰스 타운의 4인조 강도단의 리더인 더그(벤 에플랙 분)는 범행 와중에 인질로 잡았던 여성 은행장 클레어(레베카 홀 분)로 인해 정체가 들통 나는 것이 두려워 접근하다 연인 관계로 발전합니다. 다혈질의 동료 젬(제레미 레너 분)은 더그에게 클레어를 살해할 것을 독촉하지만 더그는 클레어와 연인으로 발전했다는 사실을 숨기며 살해할 것을 거부합니다.

척 호건의 소설을 벤 애플렉이 감독 및 주연을 맡은 ‘타운’은 보스턴의 지역성을 강조하며 사실성을 확보합니다. 오프닝의 자막부터 더그와 젬의 출신지인 보스턴의 찰스 타운이 범죄가 가업처럼 대물림되는 지역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타운’으로 인해 찰스 타운이 우범 지대로 낙인찍혔다는 지역 주민들의 비난이 두려운 듯 엔드 크레딧에서는 ‘선량한 시민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고 면피하며 오프닝 크레딧을 정면으로 부정해 실소를 자아냅니다.) 더그의 옷차림은 물론 대사 등에서도 ‘하버드’, ‘레드 삭스’ 등 보스턴하면 연상되는 고유 명사를 나열하더니 강도단의 최종 목표가 레드 삭스의 홈구장 펜웨이 파크로 설정됩니다. 이처럼 보스턴의 지역성을 강조한 것은 벤 애플렉의 희끗희끗한 흰머리와 레베카 홀의 얼굴 가득한 주근깨가 가감 없이 노출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실성을 강조하기 위한 연출입니다. 총격전 장면의 강력한 음향 역시 사실적이며 매력적입니다.

범죄자와 화이트 컬러 여성의 계급을 넘어선 사랑, 그리고 연인을 위한 마지막 한탕이라는 서사의 얼개는 ‘칼리토’나 ‘히트’ 등을 연상시킵니다. 범행을 위해 독특한 가면을 착용하는 것은 ‘다크 나이트’를, 비좁은 골목에서의 자동차 추격전은 제이슨 본 3부작을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오프닝 이후 1시간 정도 긴박하게 갈등을 엮어나가던 ‘타운’은 중반 이후 긴장감을 상실하며 범작의 길을 걷습니다. 이를테면 클레어를 둘러싼 더그와 젬의 갈등을 심화시키지 못하며, 더그와 젬을 제외한 2명의 캐릭터를 활용하지 못하는 것도 아쉽습니다. 거액의 현금을 보유한 펜웨이 파크는 너무나 쉽게 털리고, FBI는 유일한 생존자 더그를 체포하기 위해 레베카의 집만을 지킬 뿐, 이미 인지하고 있는 인적 사항을 활용한 지명수배조차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더그는 유유히 보스턴을 떠나는 것이 가능해지는데, 갱 영화의 장르적 결말에 충실하게 장렬히 산화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연인과 함께 도주해 꿈을 이루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결말은 ‘쇼생크 탈출’을 연상시키려는 의도였는지 모르나 카타르시스는커녕 마무리가 덜 되어 찜찜한 기분으로 극장을 나서도록 합니다. 극중에서 감독이자 주연인 벤 애플렉의 대사에서 언급되는 미국 드라마 ‘CSI’의 확장판을 극장에서 걸어놓은 듯합니다.

‘타운’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공간적 배경 보스턴과 더불어, 늙은 갱 두목 퍼기 역의 피트 포스틀스웨이트를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피트 포스틀스웨이트의 출연 장면은 짧지만 퍼기의 최후를 비롯해 강렬한 아우라를 발산합니다. 피트 포스틀스웨이트는 지난 1월 2일 세상을 떠났는데, ‘킬링 보노’를 제외하면 마지막 출연작이니 ‘타운’이 유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